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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역사 #59] 갈등 및 폐지

기사승인 2018.11.08  10: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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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저화 통용의 폐단을 연명 상소하다

ⓒ 국사편찬위

[교육전문지 뉴트리션] 사헌부·사간원에서 또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자고로 제왕이 법을 세우고 제도를 창설하는 것이 민정(民情)에 근본을 두지 않음이 없는데, 지금 국가에서 중조(中朝)를 모방하여 저화(楮貨)를 인쇄하여 만들어서 공사(公私)의 보화(寶貨)로 삼았으니, 국가의 무궁한 이익이 될 뿐 아니라, 또 수운(輸運)하고 저축하는 데에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법(立法)하던 초에 신하들이 미법(美法)이라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나라와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좋은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저화(楮貨)가 반행(頒行)된 이래로 맨 먼저 창름(倉廩)을 풀어서 백성들이 무역하도록 들어주어 백성에게 신(信)을 보이고, 또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상오승포(常五升布)를 교환하여 끊어서 세 끝[三端]으로 만들어서 그 의심하는 바를 막았으니, 법을 세운 뜻이 엄하고 정밀합니다.

그러나 토풍(土風)과 민산(民産)이 중국과 같지 아니하여, 일국(一國)의 인민이 수군수군[囂囂]하고 믿지 않아서 저화를 무용지물로 여기어, 날로 더욱 근심하고 의심하여 물가가 오르는 것이 한이 없습니다. 시관(市官)이 금하는 바가 더욱 엄하나 저화의 가치는 더욱 천하여지니, 어찌 오래 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곡식이 이미 마당에 올랐으니, 미속(米粟)의 값은 마땅히 떨어져야 될 것인데, 거리[委巷]의 가난한 백성들이 한 장(張)의 저화를 가지고 한 말[斗]의 쌀을 사려고 하여도 살 수가 없어, 굶주림에 부대끼어 원망이 막심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인정(人情)은 성인(聖人)의 밭[田]으로서 치도(治道)가 나오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나라 육지(陸贄)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도(要道)는 민중의 마음을 얻는 데에 있고, 민중의 마음을 얻는 요도는 정(情)을 보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저화를 쓰는 것이 원망을 살 뿐이고, 이익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니, 민정(民情)에 거슬리는 바를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저화를 좋은 법이라고 하였다가, 행한 뒤의 폐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고치기를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군정(群情)을 살피시어 유사(攸司)에 영(令)을 내려 구제(舊制)를 고치도록 하시면, 참으로 편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갑자기 고칠 수 없다면, 저화에 써 있는 글에 ‘상오승포(常五升布)와 통행(通行)한다.’고 하였으니, 저화와 병용하게 하여, 백성이 좋아하는 대로 들어주고, 억지로 행하게 하지 말아서, 그 정(情)을 순(順)히 하소서."

라고 했고, 모두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했다.

삼부(三府)에서 함께 의논하였는데, 저화를 쓰자는 의논은 가부(可否)가 서로 반반이고, 주포(紬布)를 회복하자는 의논은 가(可)가 반이 넘었다.

사헌부에서 저화 사용을 강력 시행할 것을 건의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하여 저화(楮貨)를 행하기를 청했다. 소(疏)의 대략은 이러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인주(人主)의 이권(利權)은 하루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산택 자연의 이(利)로써 그 백성을 이롭게 하였는데, 그 이(利)되는 것이 마치 샘이 마르지 아니하여 천지(天地) 사이에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재물(財物)을 쓰는 도(道)는 우(虞)나라·하(夏)나라·상(商)나라 세상부터 그러하였고, 주(周)나라 태공망(太公望)에 이르러 육부(六府) 삼직(三職)의 관(官)을 세워 총재(冢宰)로 하여금 맡게 하여, 재회(財賄) 를 거두고 재용(財用)을 조절하였습니다.

그 제도는 금(金)을 쓰고, 혹은 전(錢)을 쓰고, 혹은 도(刀)를 쓰고, 혹은 포(布)를 쓰고, 혹은 귀(龜)·패(貝)를 썼는데, 화도(貨刀)의 설(說)은 그 제도를 알 수 없고, 패(貝)는 서방(西方)의 풍속으로 지금도 화(貨)로 씁니다.

금(金)은 보화(寶貨)인 것을 취한 것이요, 전(錢)은 천(泉) 의 뜻을 취한 것이요, 포(布)는 포(布) 를 취한 것이니, 요컨대 모두 유행하여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 때에 궐내(闕內)의 용도가 넉넉지 못하므로 백록비폐(白鹿皮幣)를 만들고, 용(龍)·말·거북으로 각각 그 값을 정하여 문란하지 않으니, 국용(國用)이 이것을 힘입어서 조금 펴졌고,

당헌종(唐憲宗) 때에 상고(商賈)로 하여금 경사(京師)에 이르러 전(錢)을 부가(富家)에 맡기고 가벼운 행장(行裝)으로 사방에 가서 권(券)을 맞추[合]어 취하게 하고, 그것을 비전(飛錢)이라 이름하였으니, 이것은 저폐(楮幣)의 법이 한(漢)나라 때에 시작하여 당(唐)나라 때에 행한 것입니다.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에 촉(蜀)을 진수(鎭守)하는 군사가 철전(鐵錢)이 무거워서 수운(輸運)하기에 불편하므로,

이에 질제(質劑)의 법을 설정하였으며, 송 인종(宋仁宗) 때에 촉(蜀)사람의 교자(交子)가 백성의 쟁송(爭訟)을 일으키므로, 의논하는 자가 관(官)에서 스스로 교자의 사무를 파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고 쟁송을 그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원(元)나라 세조 황제(世祖皇帝)가 즉위하던 처음에 안동 승상(安童丞相)의 의논을 써서 중통 교초(中統交鈔)를 만들어 행하고,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연경(燕京)에 평준고(平準庫)를 세워 물가를 균평(均平)하게 하고, 초법(鈔法)을 통리(通利)하게 하였으며, 지원(至元) 2년에 저폐(楮幣)를 회계(會計)하니, 모두 5만 7천 6백 82정(錠)이었습니다.

그 뒤에 천하에 조서(詔書)하여 동전을 거두어 들였으니, 대개 초(鈔)의 이(利)에 손(損)이 있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24년에 이르러 다시 지원 보초(至元寶鈔)를 만들어 천하에 반행(頒行)하고, 중통초(中統鈔)와 병행(幷行)하여, 새 것이 남아도는 것이 없고, 묵은 것이 폐지되는 것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저화의 법이 당나라 때에 성하고 원나라 때에 크게 행하여진 것입니다.

황명(皇明) 태조 황제(太祖皇帝)께서 처음 사해(四海)를 차지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휘호(徽號)를 달리 하여 천하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였으나, 저폐(楮幣)의 한 가지 법만은 그대로 전철(前轍)을 따랐으니, 대개 이권(利權)이 위[上]에 있는 것을 취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 국가가 멀리 바다 모퉁이에 있어서 스스로 토물(土物)을 가지고 화폐를 삼아서, 삼국(三國)으로부터 전조(前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포(麻布)를 화폐로 하여 오승포(五升布)를 썼는데,

처음에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고, 물건을 살 수 있어, 저자의 값[市價]이 둘로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편케 여기었는데, 세대가 오래 됨에 미쳐 간위(奸僞)가 날로 늘어서, 포(布)가 오승(五升)으로부터 삼승(三升)으로 변하니, 여공(女工)은 쉽고 매매 가격은 천(賤)하여졌습니다.

전(錢)은 깨지면 다시 주조(鑄造)할 수 있고, 저(楮)는 해지면 거듭 만들 수 있지마는, 포(布)는 떨어지[弊]면 마침내 쓸데가 없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영위하고, 생산[營産]하는 것으로 이(利)를 삼아, 오직 조세(租稅)만 내어서 군국(軍國)의 수요에 이바지하는 것만 알고, 이권(利權)이 인주(人主)에게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생각건대, 국가가 창업(創業)한 지 오래지 않은데, 전하께서 문(文)을 지키는 임금으로서 정병(政兵)의 권한을 총람(摠攬)하고 이권(利權)이 행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근자에 대신(大臣)과 더불어 전고(前古)의 일을 상고하여 참작하고, 한(漢)·당(唐)·송(宋)·원(元) 이래의 저폐법(楮幣法)을 취(取)하여 관사(官司)를 베풀고, 국(局)을 두어 경내(境內)에 통행(通行)하는 보초(寶鈔)를 만들어서 민간(民間)에 행하니,

백성들이 보는 자가 믿지 않고 말하기를, ‘이 물건은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으며, 하나의 치대(緇帒)일 뿐이니, 어디에 쓰느냐?’ 하여, 본값[元直]이 날로 감하여지고, 물건 값은 몇 배나 뛰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행할 수 없다고 말을 하면 만구(萬口)가 화답하는데,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이 옆에서 보고 불가하게 여기지 않고, 또 따라서 설명까지 합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백성은 말미암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하였으니, 대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백성은 이미 알게 할 수가 없지마는, 식자(識者)도 의혹하지 않는 견해가 없어서, 이에 대간(臺諫)이 교장(交章)하여 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의정부(議政府)에 내려서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저(楮)와 포(布)를 겸행(兼行)하는 법을 정하였는데, 얼마 뒤에 저폐(楮幣)는 폐지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원숭이를 시켜 나무에 오르게 하지 말라. 더러운 진흙 위에 다시 더러운 진흙을 바르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대저 저화(楮貨)를 좋아하지 않는 백성을 가지고 겸행(兼行)하도록 인도하면, 의당 저(楮)를 버리고, 포(布)를 취할 것입니다.

법이 이미 섰는데, 폐단도 생기지 않아서 갑자기 그만두니, 무릇 정치를 하는 사람이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권(利權)의 폐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시고, 중국의 행할 수 있는 법을 모방하시어 거행하고, 인하여 닦으시면, 국(局)을 고쳐 설치하지 않고, 관(官)을 고쳐 베풀지 않고도, 이리 통하고 저리 통하여, 샘이 흐르는 것 같아서, 국용(國用)이 넉넉하고 민식(民食)이 족하게 될 것입니다."

저화를 사용치 않기로 해서 사섬서를 혁파하다

사섬서(司贍署)를 파했다. 처음에 대사헌(大司憲) 이첨(李詹) 등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초법(鈔法)의 회복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세 번째 상소하기를,

"관(官)을 고쳐 설치하지 않고, 법(法)을 고쳐 세우지 않으면, 민심(民心)이 정하여지지 않으니, 만일 초법(鈔法)을 행할 수 없다면, 사섬서(司贍署)를 혁파하여 백성의 뜻을 정하소서."

라고 하자, 임금이 박석명(朴錫命)에게 이르기를, 

"저화(楮貨)를 행하려면 사섬서(司贍署)를 혁파하지 않는 것이 옳고, 저화를 행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관사(官司)가 되니, 혁파하는 것이 옳다. 나는 저화를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 만일 나라에 이(利)가 있다면, 내 신후(身後)를 기다려서 다시 사섬서를 세워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백성에게 원망을 들어가며 나라에 이(利)가 되게 하면, 또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금후로는 크게 나라에 이익이 있고 백세(百世)라도 변치 않을 일이 아니면 새 법을 세우지 말라. 왕안석(王安石)의 일을 거울삼을 것이다.

천변(天變)이 위에서 움직이고 지변(地變)이 아래에서 움직이니, 나의 수명(壽命)이 길지 짧을지를 알 수 없다. 오늘의 민심(民心)으로 본다면 다시 저화를 행하는 것이 매우 불가하다. 경이 이 말로써 자세히 정승(政丞)에게 고하라."

하고, 또 스스로 탄식하기를, 

"처음에 저화를 만든 것은 나의 허물이다. 누구를 탓하랴?"

라고 했다. 상서 소윤(尙書少尹) 김과(金科)에게 명(命)하기를,

"초(鈔)를 쓴 이래로 원망이 자꾸 일어나므로, 지난번에 대간(臺諫)의 청을 따라 초(鈔)를 파하고 다시 포(布)를 썼는데,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초법(鈔法)을 부활시킬까 두려워하니, 내가 사섬서를 혁파하여 백성에게 신(信)을 보이고자 한다. 너도 또한 이것으로 하윤(河崙)에게 고하라."

라고 하자, 윤(崙)이 말하기를,

"초법(鈔法)을 행한 것은 신충(宸衷) 에서 나와서 백관에게 의논하여 모두 가하다고 한 연후에 정하였으니, 경솔히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여, 국가의 용도가 매양 넉넉지 못한 것을 근심하니, 비록 공(功)과 상(賞)이 있더라도 무엇으로 대접하겠습니까?

하물며 이권(利權)이 백성에게 있는 것은 불가합니다. 초법(鈔法)이 공사(公私)에 유리한 것은 전해 들은 일이 아니고, 중국에서 이미 행하고 있어 신 등이 눈으로 본 것입니다. 어찌 한두 신하의 말로 가볍게 국가의 성법(成法)을 변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 자료 제공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http://www.sejongkorea.org ]
국사편찬위원회 [ http://sillok.history.go.kr ]
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종합DB - http://db.itkc.or.kr ]
문화재청 [ http://www.cha.go.kr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http://stdweb2.korean.go.kr ]


◇ 정정·반론보도 청구 안내
관계법령(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본 기사에 대하여 '정정·반론' 보도를 청구할 수 있으며, 정정 및 반론보도 청구를 원하시는 경우 뉴트리션 사이트 하단 '불편 신고' 를 통하여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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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식(교육 뉴스 1부) concert@nutrition2.asia

<저작권자 © 뉴트리션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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