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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리션 특별기획 -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역사 #53] 사병을 혁파하다

기사승인 2018.09.28  14: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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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을 혁파하니,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노출되다

ⓒ 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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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문지 뉴트리션] 사병(私兵)을 혁파했다. 사헌부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했다.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함이 있어야 하고, 흩어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흩어서 주장하고 통속함이 없으면, 이것은 태아(太阿)040) 를 거꾸로 쥐고 남에게 자루를 주는 것과 같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각각 도당을 심어서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지고, 그 형세가 반드시 나뉘어져서, 서로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화란(禍亂)을 이루게 됩니다. 동기(同氣) 간에 서로 해치고 공신(功臣)이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여기에서 비롯되니, 이것이 고금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집에 병기(兵器)를 감추지 않았다.’ 하였으니, 사병(私兵)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병혁(兵革)을 사가(私家)에 감추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이것이 인군을 협박하는 것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사병(私兵)이 있으면, 반드시 강포(强暴)하고 참람(僭濫)하여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법을 세우고 교훈을 남기어 후환(後患)을 막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던 처음에, 조용히 담소(談笑)하면서 능히 공신의 병권을 해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전(保全)할 수 있게 하였으니, 후세의 규범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 와 진(晉)나라의 육경(六卿) 과 한(漢)나라 말년에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난 것과 당(唐)나라 말년에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한 것이 모두 사병을 길러서 난을 꾸민 때문이었으니, 또한 후세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개국하던 처음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오로지 병권을 맡게 하니, 규모가 굉원(宏遠)하였습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혁명(革命)하는 초기에 인심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우(不虞)의 변(變)을 방비해야 합니다. 훈신(勳臣)·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私兵)을 맡게 하여 창졸(倉卒)의 일에 대응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병을 다 없애지 못하였는데, 군사를 맡은 자가 도리어 난(亂)을 선동하기를 꾀하여 화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전하를 인도하고 도와주어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병을 두는 것을 오히려 전과 같이 하고 인순(因循)하여 해제하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이미 일찍이 글장을 올려 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다시 군사를 맡기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소장(蕭墻)의 화가 지친(至親)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병을 두는 것은 한갓 난(亂)만 일으키고 그 이익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대간(臺諫)의 말이 이제 이미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사문(私門)의 군사를 지금도 역시 파하지 않으니, 장래의 화를 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더구나 외방 각도의 군마(軍馬)를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혹은 시위(侍衛)라 칭하고, 혹은 별패(別牌), 사사 반당(伴儻)이라 칭하여, 번거롭게 번상(番上)하고 소란하게 징발(徵發)해서 그 폐단이 심히 많으며, 배종(陪從)이 많고 전렵(田獵)이 잦아서 그 수고로움이 또한 지극합니다. 사람은 굶주리고 말은 지쳤으며, 비와 눈을 마구 맞아가며 사문(私門)에 숙직하므로, 군중의 마음이 원망하고 탄식하니, 심히 민망한 일입니다.

지금의 큰 폐단이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서울에 머물러 있는 각도의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모조리 혁파하고,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어 공가(公家)의 군사를 삼아서, 체통(體統)을 세우고 국권을 무겁게 하고, 인심을 편안케 할 것입니다.

양전(兩殿)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는, 사문(私門)의 숙직은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고, 조회하는 길에도 사사 반당(伴儻)으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근수(根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예전의 집에 병기를 감추지 않는다는 뜻에 응하고, 후일에 서로 의심하여 난을 꾸미는 폐단을 막으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하게 했다. 이날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했고, 이저(李佇)가 평주(平州)에서 사냥하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돌아오게 했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한 참판삼군부사 조영무를 황주에 귀양보내다

ⓒ 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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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조영무(趙英茂)를 황주(黃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대간(臺諫)에서 조영무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천우(李天祐) 등을 탄핵하여, 서리를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고,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했다.

"병권은 흩어서 주장할 수 없고, 마땅히 체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신 등이 사병(私兵)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가 유윤하시고 시행하여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였으니, 신민(臣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환란을 염려하고 위태한 것을 막는 것이므로, 종사(宗社) 만세의 큰 계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조영무(趙英茂)가 삼군부(三軍府)에서 병기(兵器)를 거둬들일 때를 당하여 즉시 수납(輸納)하지 않고, 삼군부 사령(使令)을 구타하여 상하게 하고, 그 군관(軍官)의 패기(牌記)를 여러 날 동안 보내지 않고, 많은 사사 반당(伴儻)을 숨기었습니다.

또 세자(世子)에게 군사를 혁파하는 까닭으로 하여 경솔하게 불손한 말을 하면서 옥신각신 힐난하고, 서로 모여서 음모하여 화란(禍亂)을 선동하려 하였습니다. 이천우·조온 등도 또한 모두 패기(牌記)를 곧 수납하지 않고 여러 날을 끌면서 임의로 군목(軍目)을 감하고, 모이어 부도한 일을 꾀하였습니다.

위의 조영무 등은 모두 공신이니, 마땅히 국가의 대체(大體)를 생각하여 교지(敎旨)를 내리던 날에 가지고 있던 군목(軍目)·군기(軍器)를 즉시 공가(公家)에 돌려야 할 터인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고 도리어 불평 불만을 품어 왕지(王旨)를 좇지 않고, 사사로 군병(軍兵)을 감추고 있으니, 도모하는 바가 불측합니다.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꼬리가 커져 흔들지 못하는 근심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 임금을 무시하고 음흉 간사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곧 유윤(兪允)을 내리시고, 조영무·이천우·조온은 그 고신(告身)을 거두고 그 죄를 국문하여, 율에 따라 시행해서 난의 근원을 막으소서."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에 대간(臺諫)이 다시 상소했다.

"신 등이, 조영무·이천우·조온 등이 사병(私兵)을 혁파한 뒤에 사사로 군병을 숨기고, 모여서 음모한 사실을 소(疏)로 갖추어 아뢰었사온데, 전하께서 즉시 유윤(兪允)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이 명령하면 신하가 행하는 것이 예(禮)의 큰 것이니, 만일 예가 없으면 어떻게 군신(君臣)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국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하가 국가의 대계(大計)로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었는데, 지금 조영무 등이 전하의 원대한 계책을 생각지 않고 병권을 잃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서 왕지(王旨)에 따르지 않고, 군목(軍目)과 병기(兵器)를 곧 수납(輸納)하지 않고, 마음대로 삼군부(三軍府)의 공문[牒]을 가지고 간 사령(使令)을 때리고, 서로 모여서 음모하였으니, 그 조짐을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불손한 말로 세자(世子)에게 반항하였으니, 그 예(禮)를 범하고 능멸하고 참람한 죄상이 또한 이미 밝게 나타났습니다. 신하로서 이 지경에 이르는데 너그럽게 용서함을 얻는다면, 신 등은 두렵건대, 견빙(堅氷)의 근심이 장차 이르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을 징계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전의 상소에서 아뢴 바 죄상 조건에 의하여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하지만, 임금이 공신이라 하여 또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날에 대간이 또 상소했다.

"신 등은 조영무 등이 범한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되므로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그들이 공신이라 하여 유윤하지 않으시니, 신 등이 황공하고 간절함을 스스로 그치지 못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상벌이 밝지 않으면, 착한 일을 하는 자를 권면할 바가 없고,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상벌을 중(重)하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조영무 등이 왕실에 공이 있다 하여 후한 상으로 보답해서 부귀하게 하시니, 상은 큽니다.

지금 공을 믿고 능멸하고 참람하여 신하로서 하지 못할 죄를 범했는데, 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전하가 비록 공신(功臣)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지성으로 돕고 허여(許與)하시나, 불우(不虞)의 변은 매양 공신의 손에서 나옵니다.

만일 공(功)을 논하여 가볍게 용서하시면, 사람사람이 더욱 전횡(專橫) 방자한 마음을 내어 두려워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장차 반드시 화란이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전의 상소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삭직(削職)하고 국문해서, 율에 따라 논죄하여 난의 근원을 막으소서." 

이에 임금이 "조영무는 범한 것이 중하니 외방에 귀양보낼 만하고, 이천우와 조온은 다시 의논하지 말라." 라고 말했다.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한 지삼군부사 이천우와 참찬문하부사 조온을 파면하다

ⓒ 국사편찬위
ⓒ 국사편찬위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천우(李天祐)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을 파면했다. 대간(臺諫)이 또 상소하여 조영무·이천우·조온 등의 죄를 청하여 두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대간이 함께 대궐 뜰에 나아가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좇지 않으니, 대간이 "모두 언관의 책임을 다할 수 없다' 하여 사직서를 올렸다. 임금이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대성(臺省)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고, 곧 세자를 불러 묻기를, "대성이 내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사직하고 물러갔으니, 어떻게 처리할꼬?" 라고 했다.

이에 세자는 "간관의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 했다. 임금의 뜻이 이에 결정되어, 드디어 대성(臺省)을 부르고 도승지(都承旨) 정구(鄭矩)를 시켜 전지(傳旨)하기를, "지난번에 경들의 아뢴 바가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두 사람이 훈신(勳臣) 친척(親戚)인 때문에 차마 갑자기 결단하지 못하였다. 내가 마땅히 따르겠으니, 경들도 마땅히 직사에 나와야 한다." 고 하고, 드디어 그 사직서를 돌려주고, 이어서 이천우와 조온의 관직을 파면했다.

세자가 간의(諫議) 서유(徐愈)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조영무·조온·이천우의 일은 처결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언관(言官)들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영무·이천우 등이 음모하고 모였다.’ 하니, 과연 그 말과 같다면 국문(鞫問)하여 후일을 경계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하나, 다만 그 음모한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주상께서 이러한 까닭으로 부득이 가벼운 법전(法典)에 따라서 파직(罷職)만 하여 공신(功臣)을 보전한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자 "신 등은 직책이 간쟁(諫諍)에 있으므로 감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근일 전하의 처결은 곧 성인의 권도(權道)입니다." 라고 서유가 답했다.

◆ 자료 제공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http://www.sejongkorea.org ]
국사편찬위원회 [ http://sillok.history.go.kr ]
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종합DB - http://db.itkc.or.kr ]
문화재청 [ http://www.cha.go.kr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http://stdweb2.korean.go.kr ]
◇ 정정·반론보도 청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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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민(교육 뉴스 3부) concert@nutrition2.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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